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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은 웹툰(5): 어떤 웹툰에 대한 소수의견

[새디스틱 뷰티] 외전B가 봄툰 서버를 터뜨렸다. [새디스틱 뷰티]는 BDSM 소재의 성인 웹툰이다. 성인물 치고는 호흡이 꽤 긴데(117화 완결) 내가 이 웹툰을 끝까지 잡고 본 이유에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론 문창과-출판계를 배경으로 끌어왔기 때문이고(개인적인 흥미다), 작화가 훌륭하기 때문이고(성인물은 어찌됐건 누드를 그려야 하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벗는 순간 너무나도 명징하게(…) 느껴진다), ‘시대정신’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여성향 에로물에는 어떻게 스며들고 융화될 수 있는지 관찰하기 좋은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천두나’. 문창과 재학 중 이미 등단하다 못해 심지어 데뷔작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버렸지만, 여류 작가라는 딱지가 커리어에 페널티가 될 거라 예상해 ‘천반석’이라는 가명으로 활동 중이고, 몇 년 간 슬럼프에 빠져 차기작을 내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고 이 믿을 수 없이 엄청나게 유망한(…) 예술가가 부진한 원인이 변민호, 미래에 [외전 B]의 주인공이 될 예정인 구남친이다. 천두나와 문창과 CC였던 변민호는 자격지심 덩어리다. 남의 글에 대한 신랄한 평가로 분위기를 조져 놓지만 자기 글은 또 제대로 쓰지는 못하는 합평 빌런의 전형이랄까 그런 것이다. 그런 남자 변민호가 여자 천두나와 사귀었으니 결말은 예상 가능하다. 변민호의 죄목은 가스라이팅이다. 천두나의 글을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그래서 천두나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래서 천두나는 변민호의 평가적 시선에 갇혀버린 것이다. 어리고 순진한 시절, 대체로 예스걸이었던 천두나는 변민호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막 나가는 심정에서 동기인 차우경(남자)과 섹스를 하고, 에세머인 차우경과의 관계 속에서 펨돔으로서의 재능(...)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이후는 엄청나고 엄청난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새디스틱 뷰티]는 이 과격하고 지배적인 색정광이면서 한편으로는 방어적이고 자기징벌적인 측면이 있는 천두나가 ‘우해솔’이라는 순종적인 남자와 순정한 사랑을 만나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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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은 웹툰(4): [소녀재판]

박가을은 2020년의 [웹툰! 이 여자가 이상해] 대상감이 아닐까 한다(내가 방금 만든 어워드다). 굳이 2021년이 아닌 2020년을 꼽은 이유는 등장 당시에 박가을의 막나가는 혐성이 충격적으로 신선했기 때문이다. 물론 못생긴 여자가 혐성으로 나오는 웹툰이 드물지는 않다. [좋아하는 이유]가 어느정도 그랬고 [두번째 생일]이 정말 그렇고 [마스크걸]도 그랬고 동작가의 신작인 [팔이피플]도 그럴 예정인 듯하다. 그런데 박가을은 못생긴 여자이면서 파멸하거나 복수하는 여자가 되지는 않는다(아직은 아니다). 안경쟁이에 교정 중, 멋 부릴 줄 모르는 음침한 분위기의 박가을은 여고생 호모소셜 서열 공식으로 치면 3군 정도인 자신의 주제파악을 냉정하게 하면서도 솟구치는 욕망을 외면할 줄도 모른다. 그런 박가을의 욕망이란 몹시 단순해 보인다. 잘생긴 남자가 좋고 잘 생긴 남자와 사귀고 싶고 뽀뽀하고 싶다.  박가을은 반 남자애들이 같은 반 여학생들의 외모를 품평하면서 서열을 매겼다고 분개하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오히려 나는 몇 위였을지 궁금해하고 수업시간에 자기 나름대로 남학생들의 외모 순위를 문서로 작성(..)하다가 교사에게 걸려서 공개적으로 쪽을 당하는 캐릭터다. 이건 미러링 같은 게 아니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찐따’라고 해도 꿈꾸는 건 자유인 것이다. 웹툰 [미완결]의 캐릭터 민아에 버금가는 얼빠지만 못생긴 여자, 꾸밀 줄 모르는 여자, 학생이라는 등등의 여러가지 제약으로 인해 자신의 환상을 쉬이 실현할 수 없던 박가을에게 어느 날 역전의 기회가 굴러들어온다. 친절하고 잘생긴 수재에 인기 유튜버인(공부 스트리밍으로 인기를 끌었음) 동급생 한유현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아낸 것.   박가을은 우연한 계기로 늦은밤 학교에 들어갔다가 한유현이 다른 동급생 진은설의 추락사 현장에 있었음을 목격한다. 두 사람은 연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고, 한유현은 수상할 정도로 이 사실을 감추고 싶어한다. 그래서 박가을은 비밀유지를 조건으로 한유현과 억지 연애 계약을 맺...

요즘 읽은 웹툰(3): 타원을 그리는 법

미스터리(?) 치정(?) GL 웹툰이다. 순종부치와 주접팸, 유부레즈와 유자녀레즈가 나온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천재 해커고 대기업 유능 실장님이고 CHAEBOL 상속자고 그렇다(…). 이야기는 난데없는 슈퍼 이직 제안을 받은 직장인 유주하가 현 직장에 시원하게 사표를 날리면서 시작된다. 새출발 전 쉬어갈 겸 애인 김민성과 휴양을 떠나는데, 어쩐 일인지 이 외지에서 검은 의도를 가진 듯한 뉘앙스의 초면 여자들이 두 사람 주변을 어슬렁대기 시작함. 내 취향의 외모에 말까지 잘 듣는 김민성, 어느 날 하늘에서 똑 떨어진 것 같은 맞춤형 애인의 과거는 어쩐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등장인물이 많고 관계성이 복잡한 만화라 스토리를 직선적으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귀국해 보니 ML제약과의 기업 인수합병으로 유주하의 슈퍼이직 드림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가운데, 휴양지에서 김민성에게 알은체를 하던 서미연이 이 수상한 트랩의 연루자라는 게 밝혀짐. 김민성을 자기 사람으로 되찾고 싶은 서미연의 감정이 사랑인지 뭔지 모르게 서미연도 나름대로 유독한 사랑의 거미줄에 걸려 있다(…) 그 상대가 ML제약의 이사이자 chaebol 후계자인 유영애. 아무리 쇼윈도 부부라지만 대외적으로 기혼자이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찐사랑을 오른팔로 묶어 두고 줄타기 중인 야망녀임. 여기에 천재 해커 김민성의 재능을 원하는 2인조가 접근하면서 ML제약을 와해시키려는 듯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거부할 수 없는 삼백안 유부레즈 유영애 그러니까 처음에는 이 만화는 더러운 방식으로 성장해 온 부패 대기업과(범죄물에서 제약회사의 역할이란 주로 그런 것이니까) 직장과 가정(?)을 지키고 싶은 소시민의 싸움인가 했는데 계속 보다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함. 사랑과 의존과 질투와 WONHAN이 얼키고 설켜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는 와중에 의뭉스러운 내 여자의 비밀도 한꺼풀씩 벗겨지게 되는 것. 시즌 2 막바지에 오면 모르는 게 나은 비밀을 알고 나서도 ‘...

요즘 읽은 웹툰(2): [격기3반]

출발은 아버지 살해라는 소년만화 내지는 남자영화의 클리셰적 목적의식이 주인공을 움직이는 종합격투기 학원물이었다. 전말은 이렇다. 전설적인 주짓수 격투가였지만 아버지로는 인간쓰레기였던 주대각이 와이프의 장례식에 난입하여 딸을 납치해 사라진다. 몇 년이 흐른 뒤로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찾아 헤매고 있는 주대각의 아들, 주인공 주지태는 비리비리한 안경쟁이 남일고 고등학생이 되어 있음. 그런 그에게 천재 주짓떼라 마리아 다카스코스(브라질 출신 유학생)가 접근해 뜬금없이 남일고 ‘격기반’ 입반을 강요한다. 마리아에게도 어떤 사연으로 주대각은 죽여버리고 싶은 아저씨고 주대각 죽이기에 주지태를 이용해볼 속셈인 것. ~여동생 찾기~ 를 도와주겠다는 조건으로 마리아는 주지태를 격기반(종합격투기 명문 남일고의 선수 양성 특화반 같은 개념임)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마리아를 스승님 삼아 훈련 시작. 누구 아들 아니랄까봐(…) 엄청난 동체시력과 유연성, 순발력의 보유자인 주지태의 유전자에 새겨진 재능이 눈을 뜬다…! 주지태 주변인물로는 주지태를 짝사랑하는 츤데레 소꿉친구가 있고 종합격투기 덕후이자 스피드왜건 역할을 맡은 5등신 개그캐가 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엄청 진부하고 재미없는 만화 같지만 초반의 설정은 버려진지 오래다. 지금의 격기3반은 인체실험 신체개조 고어 범죄 멘탈폭력물이 되어있다. 연재되는 동안 길을 여러 번 틀었다보니 재미에도 약간 기복이 있다. 저점에서 시작해서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어쩐지 슬슬 내려와서 이제 그만 볼까 싶으면 다시 올라가는 식이다. 차소월이 갑자기 마조히스트 광견으로 본색을 드러내던 기점이 나의 2차 저점이었던 것 같음. 10대들의 몸을 통해서 초법적인 지하 범죄조직을 구현하는 소년만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스케일 키우려다 보니 10대들이 초현실적인 거물들이 되어버린다는 게 좀 웃겨서…) 딱 그 즈음부터 주지태가 너무 코리안 조커가 되어버렸고 굴다리 소년들의 파벌싸움에도 나는 관심 없었다. 그래서 한...

요즘 읽은 웹툰(1): [순정 히포크라테스]와 [닥터 스쿠르]

몇 달 정도 웹툰에 손을 놓고 있었다. 연재되는 작품 가짓수가 늘어서 그 물량을 따라갈 수 없는 것도 있고, 비슷비슷한 소재와 동인과 패턴들에 질리기도 했고, 반복되는 스크롤링을 감당할 수 없게 된 피지컬의 저하 탓도 있지만, 재미가 없어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될 것 같다는 의무감이 피로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 같음. 일 관련을 제외하곤 웹툰과 데면데면한 동안 영화와 애니메이션, 전자책(거의 일본) 만화를 주로 봤는데, 근래에 내가 만화 얘기 하는 걸 상당히 좋아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작품을 해석하거나 무슨 의의를 길어내려고 각 잡고 보는 게 아니라 그냥 가볍게 하는 잡담이 내겐 정말 재미있다. 그런데 이런 얘기 할 사람이 별로 없다. 상반기에 종이책을 이래저래 사들이다가 최근 개인 사정으로 주머니가 얇아졌다. 단행본 살 돈은 없지만 무슨 만화라도 보고 싶다 보니까 웹툰을 다시 기웃거리게 됐다. 밀린 작품이나 새 작품을 읽으며 받은 느낌은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감회였다(휴재나 완결 없었던 연재작은 열다섯 편에서 스무 편까지 쌓여 있었음). 오랜만에 봐도 재미있는 것도 있었고 정말 싫은 것도 있었고 여러가지로 독자들 힘이 엄청 세다고 느꼈고 그래서 독자들 욕을 엄청 했다. 물론 비웃으면서도 계속 읽게 만드는 것도 그 만화가 가진 나름의 힘일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이렇다할 주목 포인트가 없는 작품은 아무리 메시지가 좋아도 읽기가 힘들다. 블로그에 뭔가를 업데이트한 지도 오래됐고 조금 글을 막 쓰는 연습도 하고 싶고(난 너무 볼만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무 것도 못쓰는 그런 사람이니까?), 만화 얘기도 하고 싶어서 가볍게 쓰는 최근에 본 웹툰 이야기임. - 순정 히포크라테스(골드키위새/다음웹툰) 사실 나는 이 만화의 로맨스 라인에 별로 관심이 없다. 시즌3이 시작됐는데 사해와 장준혁이 어떻게 헤어졌는지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 다음웹툰에서 이 만화에 걸어놓은 “순정, 드라마, 사랑” 해시태그에는 #메디컬 ...

엄마는 책을 읽는다

엄마를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다. 부천으로 가는 환승역이었다. 나는 플랫폼 가판대에서 파는 아몬드 초코렛에 정신을 빼앗겨 있었다. 전철이 너무 안 왔고, 나를 끌고 다니느라 이미 지쳐 있었을 엄마는 지갑을 열었다. 슈퍼마켓에서 지폐를 내밀고 거스름돈을 받는 것 정도는 할 줄 아는 나이였다. 나는 그곳에서도 직접 거래를 고집했는데 하필이면 가판대 아주머니가 동전을 세는 사이 전철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엄마가 없었다. 어련히 잘 따라오고 있으려니 무심코 혼자 들어간 것이다. 가판대와 전철 사이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고 나는 벌써 미아가 된 다음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때 닫히던 문에 퍼억, 하고 둔탁하게 무언가 걸렸다. 문은 꿈틀거리며 다시 열렸고 난 전력으로 뛰었다. 전철칸 안의 사람들이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왜 가방도 아니고 신발도 아니고 궁둥이로 문을 막은 거야. 엄마는 처녀적 동네에서 ‘중국 미인’이라 불렸다고 몇 번이고 자랑했다. ‘중국 미인’. 그것이 당시 공유하는 미의 기준이었는지 그 동네의 유행이었는지 아무튼 그런 게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허풍은 아닌 것 같다. 그 세대 여자들과 비교하면 키가 큰 편이고 오래된 사진을 봐도 얼굴이 아름답다. 고등학교도 졸업했고 직장생활도 했다. 엄마는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일터에서 만난 첫 연애 상대이자, 앞으로 한평생을 함께 살게 될 그 은행원은 전라도 나주 출신 농부의 아들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공부로 자수성가를 이룩했다(그땐 그런 일이 가능했다). 누이들이 가지 못한 고등학교를 가고 형제들이 가지 못한 대학교를 가서 서울의 화이트칼라가 된 악착같은 남자였다. 아빠에게는 회복하고 싶은 명예가 많았다. 그는 가난의 묵은 때를 열심히 밀었고 멸시의 표적이 되는 사투리를 지웠고 삼십 대에 기어코 석사를 땄고 친가에도 처가에도 큰소리를 땅땅 쳐야 했다. 그동안 엄마는 아이를 많이 낳았다. 그래서 아빠는 한때...

그때 그 텔레비전이 좋았다고 말하지 마오

에이알에스 번호가 적인 브라운관 한 귀퉁이에서 성큼성큼 뛰는 숫자를 센다. 천만 원대는 쉽고, 억대도 보통이다.  90년대 말, [사랑의 리퀘스트]는 주말 저녁 풍경의 한 조각이었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그랬다. 그건 시청이라기보다 ‘리추얼’에 가까웠다. 보는 사람이 있건 없건 [사랑의 리퀘스트]는 늘 때맞춰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검색 포털에 키워드를 넣어보면 기획의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소년소녀 가정, 결식아동, 장애인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 희귀질환이나, 백혈병 등 난치병으로 힘겨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여러 사연을 다양한 시선으로 따라가며 그들의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따뜻한 인간애를 느껴보는 시간을 마련하는 프로그램.” [사랑의 리퀘스트]에는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지정 번호로 전화를 걸면 시청자 누구나 ‘사연’의 주인공에게 이천 원을 기부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의 리퀘스트]와 함께하는 저녁이 싫었다. [사랑의 리퀘스트] 자체가 싫었다기보다, [사랑의 리퀘스트]와 동기화되어 있는 엄마의 대본이 싫었다. “불쌍한 사람들 좀 봐. 넌 행복한 줄 알아.” 엄마는 마치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이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엄마야말로 대부분의 경우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조차 않았다. 집안일을 하거나 식사를 하면서, 틈이 나면 흘낏 쳐다보는 게 다였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참여하고 실제로 긴요한 도움이 되었을 이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선한 의도’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리퀘스트]는 그런 식으로 소비되는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었다. IMF를 통과하던 시절이었다. 텔레비전을 도배한 뉴스들만 봐도 마음이 어두워졌다.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고, 합병하고, 구조조정하고, 노숙인이 늘었고, 자살자가 늘었다. 우리 집도 휘청, 했다. 이 ‘휘청’이 우리를 무너뜨릴지 비껴 나갈지 몰랐기에 조마조마한 나날이었다. 엄마의 불쾌한 행복 교육은 그때 시작되었다. “넌 행복한...

201X1130: 원치 않는 임신을 발견했다

지금도 숨을 들이키면 그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겨울 초입의 출근길이었다. 역에서 나와 가장 먼저 보이는 약국에 들어갔다. 회사 출근 기록을 찍고 눈을 피해 화장실에 앉았다. 소름 끼치게 선명한 두 줄이었다. 테스트기는 휴지에 봉지에 엄폐해서 버렸다. 빠듯한 점심시간을 틈타 병원을 찾았다. 산부인과 이미지를 여러 개 늘어놓고 골라보라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후순위였을 것이다. 따뜻한 스태프와 행복한 임산부들로 와글와글한, 자연주의 분만을 강조하는 산부인과에서 나 혼자 세상을 다 잃은 기분이었다. 초음파를 보고 울었다. 이제 울었다는 묘사는 정보로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나는 거의 매 순간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죽여 울고, 흐느끼고, 통곡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했다. 한동안 이 이야기를 쓰는 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무엇을 구현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늘 모든 것을 말하는 데는 실패했다. 내가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는 이유와 내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 이유는 첨예하게 경합하고 있었다. 나의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시키려면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무엇이었는지, 빚, 수입, 경력, 관계까지 모든 내력을 털어놔야 할 텐데 어차피 그런 글은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셜 미디어에서 낙태와 생명에 대해 자못 아는 체 판관 노릇을 하는 남자들을 보면 피가 끓었다. 신이 나의 존재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는 것 같았던 그 순간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어쩌면 이 기억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높은 해상도를 유지하는 이유는 반쯤 그 남자들 덕인지 모른다 – 나는 원래 잘 잊어버린다). 나는 낙태죄 폐지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싶을 때마다 글이 되지 못하고 글이 되어도 온전하지 못할 내 삶의 조각을 꺼내 들곤 했다. 나의 특수한 경험은 비장의 무기 같은 것이었다. 이거면 입 다물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거야. 때때로 그것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한 사람은 물러가도 시간이...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마비된 행복

이경미 월드의 여자 주인공들은 멍청한 꿈을 꾼다. 고교 은사였던 유부남의 여자가 되고 싶어하거나([미쓰 홍당무]) 대통령 남편을 내조하는 퍼스트 레이디가 되겠다는([비밀은 없다]) 너무나 속물적이라는 이유로 명예와 멀어지는 꿈. 문제는 ‘여자 주제에’, ‘멍청한 주제에’, 혹은 ‘멍청한 여자 주제에’ 지독하게 끈질기다는 것이다. 이 폭주기관차들은 망신을 당할지언정 한 번 찍은 표적을 놓지않는다. “에이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딨어”라고 손사레치는 사람의 눈 앞에 “여기 있는데?”하며 대령해 놓은 것 같은 여자들. 역겹고 못생긴 춤을 추면서 눈을 피할라 치면 나를 관찰해보라고, 더 똑바로 보라고 흔들어 대는 이경미의 여자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설  [ 보건교사  안은영 ] 의  드라마화는  줄다리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  안은영은  정세랑  월드의  여자들이  대체적으로  공유하는  선량한  성정을  최상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  매일매일  나빠지는  것만  같은  세상이  너무  기울어지지  않도록  걸어  놓은  균형추  같은  존재 .  그는  비물질적인  에너지를  젤리  형상으로  보고 ,  만지고 ,  제거할 수도  있는  희한한  기술을  갖고  태어났지만  능력을  이용해  취할  수  있는  금전 적  이익을  자발적으로  거부했다 .  인류를  위한  그의  무급  봉사는  허공에  주먹질하는...

영화 [도희야]: 여성 청소년이라는 이중의 심연

  오혜진의  책  [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 을  읽으면서  영화  [ 도희야 ] 를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  이  책의  4 장에  수록된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에는  레즈비언  섹스를  낭만화하는  외부적  상상력에  대한  인상적인  지적이  실려  있다 .  이성애  섹스를  현실  권력  관계로부터  단절하여  홀가분한  태도로  상상하기  곤란해진  시대에 ,    레즈비언  섹스가  안전하고  평등한  성적  실천 ,  윤리적이고  진보적인  대안  공간 ( “유토피아” ) 로  제안되는  경향은  결국  “레즈비언  타자화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  이  글  뒤에  부록처럼  달려  있는  ‘음험하게  숭고한  사랑’에서  저자는  영화  [ 도희야 ] 를  분석하면서  앞선  문제  제기와  연결시켜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  이  영화의  주요  테마를  “구원”과  “치유” ,  “여성  연대”로  의미화하는  주류적  해석에는  관객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