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진의 책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을 읽으면서 영화 [도희야]를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4장에 수록된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에는 레즈비언 섹스를 낭만화하는 외부적 상상력에 대한 인상적인 지적이 실려 있다. 이성애 섹스를 현실 권력 관계로부터 단절하여 홀가분한 태도로 상상하기 곤란해진 시대에, 레즈비언 섹스가 안전하고 평등한 성적 실천, 윤리적이고 진보적인 대안 공간(“유토피아”)로 제안되는 경향은 결국 “레즈비언 타자화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이 글 뒤에 부록처럼 달려 있는 ‘음험하게 숭고한 사랑’에서 저자는 영화 [도희야]를 분석하면서 앞선 문제 제기와 연결시켜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의 주요 테마를 “구원”과 “치유”, “여성 연대”로 의미화하는 주류적 해석에는 관객의 “윤리적 안도”라는 목적지가 선행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다. 즉, 미성년자 도희(김새론 분)과 성인-레즈비언-경찰인 영남(배두나 분) 사이의 동성애적 교류는 과도하게 ‘불온’한 것이기 때문에, 논쟁을 모면하는 절약적 읽기로서 무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인 무성화-탈성애화가 시행된다.
(*이 글에는 영화 [도희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희야]는 영남이 파출소장으로 발령받은 지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소장이라고는 하지만, 슬쩍 보기에도 서울 말씨를 쓰는 젊은 여자가 폐쇄적인 소규모 지역 공동체의 관리자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발령의 실상은 아웃팅으로 인한 좌천이니, 영남을 사생활의 경계가 희박한 벽지에 보내는 것은 공무원 사회의 ‘품위’를 떨어뜨린 인물에게 효과적인 ‘징벌’로 보인다. 본래 근무지인 여수 경찰서의 동료들은 일 년 간 행실을 잘 단속한다는 조건 하에 복귀를 약속하고, 영남에게도 이 지역 사회에 융화될 의지는 없다. ‘외지 깍쟁이’ 영남의 벽지 탈출 프로젝트에 최대 난관은 도희다. 헝클어진 머리, 작고 더러운 옷, 나사가 풀린 것 같은 걸음걸이의 기묘한 여자아이. 영남은 도희를 조우하거나 관찰하면서 그가 학교폭력 피해자인 동시에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교폭력은 영남의 지위를 이용해 잠재울 수 있다지만, 폭언 및 폭행을 양육자의 권한으로 여기는 도희의 할머니와 아버지는 도저히 갱생의 여지가 없다. 그런 영남이 도희에게 손을 내밀고, 도희가 영남에게 마음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도희의 할머니가 해역에 추락사한 채 발견된다. 사고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도희는 ‘할머니가 나를 때리려고 쫓아오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영남에게만 은밀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중언부언하는 설명은 희뿌연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명쾌하지가 않다.
이 영화의 갈등은 영남이 과거 애인과의 재회 현장을 도희의 부친에게 발각당하며 도희에 관한 영남의 ‘의도’를 법적으로 심문당하는 지점에서 정점에 오른다. 할머니의 사망 사건 이후, 영남은 (방학이 끝날 때까지라는 조건을 걸고) 부친으로부터의 보호 차원에서 도희와 함께 생활하기로 결정했으나, 영남이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아동 그루밍-성추행 혐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1차 상담에서 도희는 명백하게 영남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든다. 영남의 발언을 허위 진술하고, 스킨십의 내용을 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진술로 인해 영남의 인생이 망가졌음을, 그로 인해 영남과 자신의 관계도 영영 끊어질 것임을 깨닫고 나자, 부친에 의한 성폭행 현장을 조작 연출해 신고하고, 이전 진술의 내용을 부친이 사주했다고 (거짓)고발함으로써 영남을 ‘구출’한다. 다소 허술한 도희의 각본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게나 관객에게나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우리가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정한 어떤 표상이 미리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나이에느 이 정도는 알지, 그 나이에 이런 것까지 알 리가 없어…… 그런 생각들 말이다.
그래서 도희가 이 영화에서 “하드보일드 필름 누아르”의 전형적인 “팜므 파탈” 캐릭터를 맡고 있다는 듀나의 평에 전적으로 동의한다.1) [도희야]의 최대 미스테리는 10대 중반의 소녀가 무엇을 아는가, 어디까지 모르는가다. 그는 때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고, 때로는 알 만한 건 다 아는 것처럼 보이고, 간혹은 자기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스스로도 모르는 듯하다. 영남은 도희에게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도희와 한 자리에서 동침을 거부하는 것, 도희가 포옹해올 때 머뭇거리는 손, 도희가 거리를 좁혀올 때 영남 쪽에서 발현되는 거리낌. 성인 여성이 청소년 여성의 대리 보호자로 임하려 할 때 으레 상상되는 ‘무성적’인 관계와는 사뭇 다른 거리 두기는 여성애자라는 의식에 기반했을 것이다. 영남은 도희를 청소년인 동시에 여성으로 봤다. 영남이 해변가에서 홀로 춤추는 도희를 감상할 때, 영남이 반신욕 중이던 목욕탕 안에 도희가 알몸으로 뛰어들 때, 저녁을 준비하는 영남에게 도희가 여자 아이돌 그룹 퍼포먼스를 선물할 때, 이 공간에 성적 긴장은 분명히 존재한다. 단지 영남은 ‘성인’이고 ‘경찰’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도덕적으로 재단하고 있을 뿐이다.
도희의 경우는 더 노골적으로 구애하는 쪽이다. 영남의 전 애인이 찾아왔을 때 도희가 표출하는 과도한 집착과 자해 행동–도희의 자해는 오히려 도희에 관한 부친의 부정적 진술에 힘을 싣는다–, ‘어린이’ 같은 수영복을 사주려는 영남과 비키니를 사고 싶어하는 도희의 충돌. 이 마을을 떠나려는 영남에게 찾아가 전 애인에게 돌아가려는 거냐며 폭주하는 도희는 이 관계를 의심하는 부친에게 아무런 해명을 시도하지 않는다. 경찰서에서 이루어진 상담에서 영남이 신체의 어느 부분을 만졌는지 재현해 보라는 의도로 주어진 인형의 성기와 가슴을 상기된 얼굴로 문지르는 도희를 오래도록 비추는 장면은 오히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도희의 욕망, 혹은 영남이 자신을 떠나게 될 거라면 (그래서 전 애인에게로 돌아간다면) 차라리 파멸시키겠다는 도희의 복수심을 비추는 듯하다. 도희의 진술을 믿으려면 청소년이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지, 어떤 욕망을 가질 수 있는지를 어른의 시선에서 적극적으로 외면하거나 간과해야만 한다.
그래서 도희가 팜므파탈이라는 것이다. 팜므파탈 캐릭터의 전형성은 여성이라는 타자, 남성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분석할 수도 없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감에 기반한다. ‘그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 탈역사적이고 탈맥락적인 존재. 커다랗고 시커먼, 들여다 보면 안 될 것 같은 불쾌한 구멍. 그것이 도희다. 희생양은 팜므파탈이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는지,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른 채로 의뭉스러운 미인의 늪에 빨려들어간다. 도희는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이 교차하면서, 성인 여성은 이해할 수 없고 남자들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드는 불가해성 자체로부터 유혹을 발산하는 인물이다. 영남은 도희가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가장 잘 안다. 할머니의 죽음도, 부친의 성폭력도 사실은 도희의 멋진 연극이라는 걸 감지한 유일한 사람. 그럼에도 영남이 도희를 데리고 떠나기로 선택하는 것이 해피엔딩일까? 이것은 정말로, 정말로 불길한 결말이다.
[도희야]는 영남이라는 인물의 “선한 의지”가 돋보이는 영화이기는 하다. 영남에게는 상황을 봐서 발휘하는 ‘융통성’이 없다. 잔인한 양육자라도 없으면 갈 곳이 없는 아이가 당하는 가정폭력도,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불법 체류자 착취도 칼 같이 잘라낸다. 그러나 [도희야]가 ‘서로가 서로를 구하는’ ‘여성 연대’ 서사라고 정의한다면 이 이야기의 너무 많은 결을 덮어버리게 된다. 일라이 클레어가 [망명과 자긍심]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면,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격이다.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여성 연대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 및 통념과 여성애적 욕망 사이에서 당황하는 영남의 긴장과, 어른들을 통제하기도 하고 목적한 바에 실패하기도 하는 도희의 순진하고 영악한 얼굴이다. 영남은 도희가 설계한 파멸과 구원 작전에 공범으로 끌어들여짐으로써 스스로 지켜 온 도덕적 무결성마저 훼손당했다. 도희를 이 마을에 두고 가려던 영남이 ‘보통 아이 같지 않다’는 남성 동료의 코멘트를 듣고 차를 돌리게 된 이유에는 진정으로 연민이나 연대감만이 작용했을까? 생각할수록 섬찟한 이야기다. 우리가 그토록 시끄러운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지나왔음에도 마침내는 그들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타자화의 억압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1) 듀나, "호평 세례 ‘도희야’ 시골 느와르 관점서 보면", (엔터미디어, 2014. 0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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