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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September, 2020

요즘 읽은 웹툰(5): 어떤 웹툰에 대한 소수의견

[새디스틱 뷰티] 외전B가 봄툰 서버를 터뜨렸다. [새디스틱 뷰티]는 BDSM 소재의 성인 웹툰이다. 성인물 치고는 호흡이 꽤 긴데(117화 완결) 내가 이 웹툰을 끝까지 잡고 본 이유에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론 문창과-출판계를 배경으로 끌어왔기 때문이고(개인적인 흥미다), 작화가 훌륭하기 때문이고(성인물은 어찌됐건 누드를 그려야 하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벗는 순간 너무나도 명징하게(…) 느껴진다), ‘시대정신’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여성향 에로물에는 어떻게 스며들고 융화될 수 있는지 관찰하기 좋은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천두나’. 문창과 재학 중 이미 등단하다 못해 심지어 데뷔작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버렸지만, 여류 작가라는 딱지가 커리어에 페널티가 될 거라 예상해 ‘천반석’이라는 가명으로 활동 중이고, 몇 년 간 슬럼프에 빠져 차기작을 내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고 이 믿을 수 없이 엄청나게 유망한(…) 예술가가 부진한 원인이 변민호, 미래에 [외전 B]의 주인공이 될 예정인 구남친이다. 천두나와 문창과 CC였던 변민호는 자격지심 덩어리다. 남의 글에 대한 신랄한 평가로 분위기를 조져 놓지만 자기 글은 또 제대로 쓰지는 못하는 합평 빌런의 전형이랄까 그런 것이다. 그런 남자 변민호가 여자 천두나와 사귀었으니 결말은 예상 가능하다. 변민호의 죄목은 가스라이팅이다. 천두나의 글을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그래서 천두나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래서 천두나는 변민호의 평가적 시선에 갇혀버린 것이다. 어리고 순진한 시절, 대체로 예스걸이었던 천두나는 변민호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막 나가는 심정에서 동기인 차우경(남자)과 섹스를 하고, 에세머인 차우경과의 관계 속에서 펨돔으로서의 재능(...)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이후는 엄청나고 엄청난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새디스틱 뷰티]는 이 과격하고 지배적인 색정광이면서 한편으로는 방어적이고 자기징벌적인 측면이 있는 천두나가 ‘우해솔’이라는 순종적인 남자와 순정한 사랑을 만나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과...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마비된 행복

이경미 월드의 여자 주인공들은 멍청한 꿈을 꾼다. 고교 은사였던 유부남의 여자가 되고 싶어하거나([미쓰 홍당무]) 대통령 남편을 내조하는 퍼스트 레이디가 되겠다는([비밀은 없다]) 너무나 속물적이라는 이유로 명예와 멀어지는 꿈. 문제는 ‘여자 주제에’, ‘멍청한 주제에’, 혹은 ‘멍청한 여자 주제에’ 지독하게 끈질기다는 것이다. 이 폭주기관차들은 망신을 당할지언정 한 번 찍은 표적을 놓지않는다. “에이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딨어”라고 손사레치는 사람의 눈 앞에 “여기 있는데?”하며 대령해 놓은 것 같은 여자들. 역겹고 못생긴 춤을 추면서 눈을 피할라 치면 나를 관찰해보라고, 더 똑바로 보라고 흔들어 대는 이경미의 여자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소설  [ 보건교사  안은영 ] 의  드라마화는  줄다리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  안은영은  정세랑  월드의  여자들이  대체적으로  공유하는  선량한  성정을  최상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  매일매일  나빠지는  것만  같은  세상이  너무  기울어지지  않도록  걸어  놓은  균형추  같은  존재 .  그는  비물질적인  에너지를  젤리  형상으로  보고 ,  만지고 ,  제거할 수도  있는  희한한  기술을  갖고  태어났지만  능력을  이용해  취할  수  있는  금전 적  이익을  자발적으로  거부했다 .  인류를  위한  그의  무급  봉사는  허공에  주먹질하는...

영화 [도희야]: 여성 청소년이라는 이중의 심연

  오혜진의  책  [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 을  읽으면서  영화  [ 도희야 ] 를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  이  책의  4 장에  수록된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에는  레즈비언  섹스를  낭만화하는  외부적  상상력에  대한  인상적인  지적이  실려  있다 .  이성애  섹스를  현실  권력  관계로부터  단절하여  홀가분한  태도로  상상하기  곤란해진  시대에 ,    레즈비언  섹스가  안전하고  평등한  성적  실천 ,  윤리적이고  진보적인  대안  공간 ( “유토피아” ) 로  제안되는  경향은  결국  “레즈비언  타자화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  이  글  뒤에  부록처럼  달려  있는  ‘음험하게  숭고한  사랑’에서  저자는  영화  [ 도희야 ] 를  분석하면서  앞선  문제  제기와  연결시켜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  이  영화의  주요  테마를  “구원”과  “치유” ,  “여성  연대”로  의미화하는  주류적  해석에는  관객의 ...

소설 [환상통]: 기술복제시대의 끔찍한 사랑

 뮤직 페스티벌에서 처음 들은 노래에 홀딱 반하거나, 별 감흥 없던 노래를 콘서트에서 재평가하게 된 적이 있는지.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던진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왜 진짜 를 원하는가’였을 것이다. 사진과 영상이 ‘기록’으로서 회화의 기능을 대체하게 된 시대에는 평생을 벌어도 못 살 가격의 예술작품도 클릭 한 번이면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다(구글 온라인 미술관에서는 이제 붓터치까지 확대해볼 수 있을 만큼 높은 해상도의 시각 자료를 제공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미술관에 간다. 무대를, 극장을 원한다. 벤야민은 원본과 모작, 원본과 복제물의 위계를 가르는 이 가치를 ‘아우라’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진품성이 뿜어내는 유일무이한 분위기; 아우라. 확실히 눈 앞에서 상연되는 예술작품에 매료되는 감정은 신비롭고 압도적이다. 그러나 아우라를 단순히 작품이 일방적으로 발산하는 마술적 힘이라고 일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작품의 구성요소와 관객의 몸이 충돌할 때, 우리는 그 시간과 장소에 관계함으로써 ‘목격’이라는 사건을 공감각적으로 수용하고 역사적으로 해석한다. 이 작업이 잘 어우러져 특별한 의미가 솟아오를 때 마침내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희주의 소설 [환상통]에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은 소위 ‘남돌에 미친 여자들’이다. 배경은 2010년대 중반 쯤, N그룹의 공개방송과 행사 스케줄을 따라다니면서 만나게 된 두 여자 – 20대 여성인 m과 만옥이 사건의 중심에 있다. 친구들에게는 관심도 없는 아이돌의 TMI를 쏟아내는 귀찮은 파리, 돈은 없지만 시간만큼은 희생할 수 있어서 학업도 직업도 내팽개친 불나방, 이루어지기는커녕 만져보지도 못할 남자에게 순정을 투신하고, 그마저도 이 그룹에서 저 그룹으로 환승하며 이 ‘병든 사랑’을 퍼붓기에 중독된 것 같은 여자들. m은 알고 있다. 환상 충족은 사진과 영상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찍덕들이 혼을 갈아넣어 보정한 사진들과 편집한 직캠들 – ‘복제품’들은 진품보다도 미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