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디스틱 뷰티] 외전B가 봄툰 서버를 터뜨렸다. [새디스틱 뷰티]는 BDSM 소재의 성인 웹툰이다. 성인물 치고는 호흡이 꽤 긴데(117화 완결) 내가 이 웹툰을 끝까지 잡고 본 이유에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론 문창과-출판계를 배경으로 끌어왔기 때문이고(개인적인 흥미다), 작화가 훌륭하기 때문이고(성인물은 어찌됐건 누드를 그려야 하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벗는 순간 너무나도 명징하게(…) 느껴진다), ‘시대정신’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여성향 에로물에는 어떻게 스며들고 융화될 수 있는지 관찰하기 좋은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천두나’. 문창과 재학 중 이미 등단하다 못해 심지어 데뷔작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버렸지만, 여류 작가라는 딱지가 커리어에 페널티가 될 거라 예상해 ‘천반석’이라는 가명으로 활동 중이고, 몇 년 간 슬럼프에 빠져 차기작을 내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고 이 믿을 수 없이 엄청나게 유망한(…) 예술가가 부진한 원인이 변민호, 미래에 [외전 B]의 주인공이 될 예정인 구남친이다. 천두나와 문창과 CC였던 변민호는 자격지심 덩어리다. 남의 글에 대한 신랄한 평가로 분위기를 조져 놓지만 자기 글은 또 제대로 쓰지는 못하는 합평 빌런의 전형이랄까 그런 것이다. 그런 남자 변민호가 여자 천두나와 사귀었으니 결말은 예상 가능하다. 변민호의 죄목은 가스라이팅이다. 천두나의 글을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그래서 천두나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래서 천두나는 변민호의 평가적 시선에 갇혀버린 것이다. 어리고 순진한 시절, 대체로 예스걸이었던 천두나는 변민호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막 나가는 심정에서 동기인 차우경(남자)과 섹스를 하고, 에세머인 차우경과의 관계 속에서 펨돔으로서의 재능(...)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이후는 엄청나고 엄청난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새디스틱 뷰티]는 이 과격하고 지배적인 색정광이면서 한편으로는 방어적이고 자기징벌적인 측면이 있는 천두나가 ‘우해솔’이라는 순종적인 남자와 순정한 사랑을 만나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과...
사람이 영화관에 모이지 못하니 영화 산업조차 주춤하는 작금의 풍경과 비교하면, 2019년은 대공황 직전에 국내 여성영화가 누린 마지막 호황기처럼 느껴진다. ‘여성서사’라는 외침에 화답하듯 영화계에서는 여성 감독과 여성 주연의 작품 개봉 소식을 부지런히 들려주었고, 페미니스트들은 관람에의 의지를 다지며 열정적으로 뉴스를 공유했다. 이 시기에는 트위터 입소문이라는, 이 실체 없는 자원이 정말로 영화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극장에 다녀 온 페미니스트들은 해당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와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저마다 작성했고 후자는 특히 폭발적인 리트윗을 받으며 ‘잠재적 관객’들의 선택을 좌우했다. 이 의견의 전염 효과는 인디극장에 주로 걸리는 여성영화에 더욱 치명적이었다. [우리집]이나 [벌새]에는 호재였지만 [아워바디]와 [메기]에는 악재였다.
어떤 작품이 ‘클린한’ 여성서사가 아니라는 점에 실망하고, 실망을 넘어 분노하고, 분노를 넘어 불매를 촉구하는 심리를 생각한다. ‘사는 것’도 운동이고 ‘사지 않는 것’도 운동이 된 시대에 ‘사지 말아야 할 것을 (실수로)사버린’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엄청나다. [아워바디]의 흥행 브레이커는 그 유명한 ‘부장 섹스’였다. 아마도 ‘건강한 몸’에 관한 여성서사를 기대했고 그 기대를 보란듯 배반당했을 관객이 남긴 비판 트윗은 극장에 그만한 관객이 들기도 전에 더 많은 대중에게 노출되었다. [아워바디]가 보지 않은 사람도 비판할 수 있는 반여성적인 영화로 분류되기는 순식간이었다. [메기]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이유는 ‘간호사 직군의 성적 대상화’였다. 주인공 여윤영(이주영 분)이 근무하는 병원의 간호사들은 캡과 원피스 유니폼을 착용하는데, 현장의 현실과도 맞지 않으며 간호사라는 직업을 성애화하는 기능만 남은 기호를 사용했으니 [메기]는 여성혐오적 영화라는 평이었다. 개봉 시점에 맞춰 상당히 신속하게 올라왔던 그 트윗을 나도 알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미안합니다). 내가 '보지 않고 판단(비판)하기'의 유효성을 강하게 회의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두어 달 뒤였다.
(*이 글에는 메기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나는 작년 11월에 한국에 있었다. 그래서 극장에서 [아워바디]를 봤다. 전국에 상영관이 몇 남지 않은 가운데서도 최종 상영일이었을 것이다. KU시네마테크에는 단 세 명의 관객이 있었으므로 9,063명의 전국 관객 기록 가운데 9,060번 쯤이었을까 싶다. 맞다. [아워바디]는 도덕적인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재미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모두가 ‘올바른’ ‘건강한’ ‘공감 가는’ 무언가를 달성하려 힘쓰는 와중에 엉뚱하게 트랙 밖으로 달려나가는 결기.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이 영화가 뒤집어쓴 필요 이상의 오명과, 이 영화를 장바구니 목록에서 영영 삭제해버렸을 사람들의 수를 생각하며 왜인지 조금 억울해졌다. [메기]의 사정은 주연 배우들의 고정 팬덤 덕분일지 그래도 조금 나았다(그리고 이 영화는 ‘반여성적’이라는 (잠재적)관객의 합의가 없었다고 해서 사람을 엄청나게 끌어모았을 법한 영화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직접 본 뒤 또 다시 조금 억울해졌는데, ‘간호사 성적 대상화’라는 죄목 때문에 토론 테이블에서 착석 자체를 거절당한 영화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다.
간호사 캡과 스커트형 간호사복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재현되지 말아야 하는 물건인가?
[메기]는 의심과 믿음에 관한 영화다. 여윤영이 근무하는 병원 엑스레이실에서 일어난 섹스 스캔들, 여윤영의 연인이자 동거인인 이성원(구교환)의 커플링 분실 사건, 이성원의 전 애인 등장과 (이성원에 의한)데이트 폭력 고발이라는 세 가지 사건이 비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도심 내 무작위적-동시다발적 싱크홀 발생이라는 재난 상황이 이들 에피소드를 가로질러 꿴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추리는 맞는 법이 없다(여윤형이 애착을 느끼는 어항 속 물고기 ‘메기’만이 유일한 전지적 관찰자다). 믿어도 배신당하고 의심해도 배신당할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사진 속 몸을 내 몸이라고 믿어버리고, 꾀병처럼 보이는 현상은 꾀병이 아님으로 밝혀지고, 범죄자가 아니라 믿으려던 사람은 범죄자고, 도둑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도둑이 아니다. 헛다리를 짚는 것은 등장인물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관객도 등장인물과 함께 이 믿음과 불신이라는 트랩에 걸려 넘어지게 만든다.
이 영화에는 영화를 가짜로 보이게 만드는 장치들이 있다. 영화의 연출과 편집 기법은 일반적으로 박진함을 최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관객이 트릭과 봉제선을 의식하지 못할수록, 현실보다도 더 현실같다는 찬사를 받을수록 완성도가 높은 영화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메기]는 서사 속에서 일종의 대체-현실을 체험하려는 관객의 다이빙을 가로막는다. 감독은 영화 속 간호사 복장이 마리아 사랑병원의 억압적인 노동 환경을 암시한다고 해명했다지만, 캡과 치마를 입은 간호사는 -적어도 나에게는- 퍼즐 판에 일부러 끼워넣은 맞지 않는 조각처럼 보였다. ‘현실감’의 구성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불순물들. 방사선실 커플이 교환하는 과장되고 어색한 공기, 아마추어의 상상도처럼 어설픈 수술 신, (때로는)영화보다 뮤직비디오에 가까운 편집의 리듬, 싱크홀 공사 현장에 놓인 싸구려 안내 풍선, 밤(chestnut)이 그려넣어져 있는 도로 표지판 같은 것이다. 마리아 사랑병원은 도무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공간 같지가 않다. 이 ‘틀린 그림’들은 영화적 몰입을 원하는 관객의 눈에 어른거리며 이 이야기를 너무 믿지는 말라고 속삭이고 있다.
허풍쟁이가 늘어놓는 조악한 거짓말 같은 풍경들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 초현실 속에 잠입해 있던 현실이 홀연히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대면을 요구하기 때문에, [메기]는 독특한 지형을 빚어낼 수 있다. 촬영한 사람보다 촬영 당한 사람을 색출하려는 사회, 기반시설이 무너지는 재난을 일자리 창출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 청년들, 경제적 취약 계층에게 특히 경쟁적인 주거 환경, 그리고 남성 파트너의 폭력성을 자꾸만 의심하게 되는 연인 관계는 우리가 경험하고 목격해 온 현실의 더러운 부분이다. [메기]는 새총 고무줄을 놀리듯 허구와 진실의 탄력성을 조절하며 과녁을 일부러 빗맞추고 실수처럼 적중한다. 이성원이 능력도 비전도 없는 잉여인간, 여자친구에게 빌붙어 연명하는 빈대처럼 보이기에 관객이 느낄 수 있는 혐오감이나 애정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속임수다. 여윤영에게 쫓겨나듯 헤어진 후 ‘엄마 집’으로 기어들어갔다던 이성원이 아파트 숲에서 멀끔한 차림으로 걸어나올 때, 그의 ‘진짜 계급’이 동반하는 배신감. 그는 심지어 여윤영 앞에서 뻔뻔할 만큼 담백한 얼굴로 데이트폭력 사실을 인정한다. 이 순간 메기가 뛰어오르고, 지반에 생긴 싱크홀이 이성원을 빨아들인다. 역겨운 진실은 추락하는 마음처럼 하강 운동한다.
누군가는 성애 판타지로 코드화된 간호사복이 어떤 맥락에서든 용납되어서는 안 되며,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그러한 재현이 대중의 심상 왜곡에 기여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절대로’에 대한 판단을 보류할 것이다. 그래서 [메기]가 반여성적인 영화인가?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데이트폭력 가해자에게 ‘천벌’을 내리는 결말은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친여성적이지 않은가? 여성영화로서 ‘간호사의 성적 대상화’는 몇 점 짜리 감점 요인이고 ‘데이트폭력 고발’은 몇 점 짜리 득점 요인인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장면과 소품 하나하나를 채점하여 합산하듯 영화를 판단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모순적이며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도덕의 순정한 경지를 추구하려는 그러한 태도야말로 [메기]의 세계관에서 가장 먼저 도전받을 취약성이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구덩이를 파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메기]는 의심의 구덩이를 파고, 관객을 몇 번이고 빠뜨려 다시 기어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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