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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ly, 2019

요즘 읽은 웹툰(5): 어떤 웹툰에 대한 소수의견

[새디스틱 뷰티] 외전B가 봄툰 서버를 터뜨렸다. [새디스틱 뷰티]는 BDSM 소재의 성인 웹툰이다. 성인물 치고는 호흡이 꽤 긴데(117화 완결) 내가 이 웹툰을 끝까지 잡고 본 이유에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론 문창과-출판계를 배경으로 끌어왔기 때문이고(개인적인 흥미다), 작화가 훌륭하기 때문이고(성인물은 어찌됐건 누드를 그려야 하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벗는 순간 너무나도 명징하게(…) 느껴진다), ‘시대정신’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여성향 에로물에는 어떻게 스며들고 융화될 수 있는지 관찰하기 좋은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천두나’. 문창과 재학 중 이미 등단하다 못해 심지어 데뷔작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버렸지만, 여류 작가라는 딱지가 커리어에 페널티가 될 거라 예상해 ‘천반석’이라는 가명으로 활동 중이고, 몇 년 간 슬럼프에 빠져 차기작을 내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고 이 믿을 수 없이 엄청나게 유망한(…) 예술가가 부진한 원인이 변민호, 미래에 [외전 B]의 주인공이 될 예정인 구남친이다. 천두나와 문창과 CC였던 변민호는 자격지심 덩어리다. 남의 글에 대한 신랄한 평가로 분위기를 조져 놓지만 자기 글은 또 제대로 쓰지는 못하는 합평 빌런의 전형이랄까 그런 것이다. 그런 남자 변민호가 여자 천두나와 사귀었으니 결말은 예상 가능하다. 변민호의 죄목은 가스라이팅이다. 천두나의 글을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그래서 천두나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래서 천두나는 변민호의 평가적 시선에 갇혀버린 것이다. 어리고 순진한 시절, 대체로 예스걸이었던 천두나는 변민호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막 나가는 심정에서 동기인 차우경(남자)과 섹스를 하고, 에세머인 차우경과의 관계 속에서 펨돔으로서의 재능(...)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이후는 엄청나고 엄청난 여자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새디스틱 뷰티]는 이 과격하고 지배적인 색정광이면서 한편으로는 방어적이고 자기징벌적인 측면이 있는 천두나가 ‘우해솔’이라는 순종적인 남자와 순정한 사랑을 만나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과...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툴리], 육아 외주 공포

셋째가 제일 쉽다고? 영화 [툴리]의 마를로(샤를리즈 테론 분)는 기진맥진하다. 윤기 없이 마른 금발은 세어버린 백발처럼 보이고, 충혈된 눈자위에 눈동자마저 빛 바랜 듯 엷은 하늘색을 띤다. 후 불면 재가 되어 바스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마를로는 출산을 앞두고 있다. 계획하지 않은 아이였다. 그는 이미 딸 사라와 아들 조나를 등교시키는 아침마다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사춘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첫째 사라에게는 손이 갈 겨를도 없다. 조나는 감각과민, 강박, 불안 등 복합적인 병증을 보인다. 테라피스트를 몇 번이나 바꿨지만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했고,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유튜브를 참고하며 자가 치료중인 조나는 학급에서도 ‘민폐’ 학생이다. 이 전쟁터에서 남편 드류는 늘 한 발자국 물러나 있다.  세상 엄마들이 다 마를로처럼 고생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예정일이 임박한 마를로 가족을 초대한 크레이그의 집은 별세계다. 마를로와 똑같이 “거지 같은 집”에서 “거지 같은 부모” 손에 자란 오빠 크레이그는 자수성가했다. 대문을 열자 크레이그의 아내 엘리스와 반려견, 세 아이들과 쿨한 베이비시터가 마를로 가족을 반긴다. 기품과 여유가 넘치는 엘리스와 위화감에 빈정대는 마를로의 대화는 헛돌기만 한다. 삐걱거리는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난 뒤, 크레이그는 마를로를 불러 내 깜짝 출산 선물을 안긴다. 야간 베이비시터(night nanny) 비용을 대주겠다는 거다. “지난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크레이그의 대사는 조나 출산 이후 마를로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었음을 넌지시 알린다(이 ‘어떤 일’은 이후 드류의 입을 빌려 ‘깊은 우울증’으로 요약될 뿐, 관객은 끝내 자세한 경과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마를로는 이 호의를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곧 양수가 터진다. 경산은 조금도 쉽지 않았다. 기저귀 전용 쓰레기통에서 줄줄이 소시지 모양으로 끌려 나오는 기저귀처럼 똑같이 생긴 나날들이 이어진다. 가슴을 열고 닫고 신생아복을 열고 닫고 기저귀를...

부서진 엄마들 Broken Mums: 들어가며

얼마 전 수잔 팔루디의 [백래시]를 읽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1972년에 가족사회학자 제시 버나드가 했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결혼은 여성의 건강에 유해할 수 있다.” (…) 이런 연구에서 기혼 여성은 싱글 여성보다 우울증이 20퍼센트 더 많이 발병하고 중증 신경증은 세 배 더 많이 나타낸다. 신경쇠약, 신경과민, 심계항진, 무력감도 기혼 여성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그 외에도 (…) 다양한 증상들이 기혼 여성들을 더 많이 괴롭힌다.” “저명한 정신 건강 연구자 제럴드 클러먼과 미르나 와이즈먼은 여성 우울증에는 두 가지 큰 원인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바로 낮은 사회적 지위와 결혼이었다.” 일련의 연구 데이터들은 1980년대 미국 저널리즘 및 미디어를 통해 전투적으로 확산된 페미니즘 백래시가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반지성적인 협잡질이었는지 반증하는 맥락에서 인용된 것이었다. 미국 페미니즘 운동이 황금기를 맞았던 70년대 이후, 안티페미니스트들은 여권 신장 역사의 시계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에 열정을 쏟고 있었다. 더 많은 여성이 가부장제 밖에서 경제적 주권을 확보할 미래에 느끼는 남성 집단의 반감은 싱글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안녕에 대한 가짜 우려로 표출되었다. 이 가짜 우려를 그럴싸하게 치장하는 데 동원된 근거와 논리들도, 물론 가짜였다. 여자들을 말그대로 집안에 ‘처넣기’ 위해 세계가 공모한 연극은 그럼에도 믿을 수 없으리만치 흥행했다. [백래시] 1부에서 저자는 이 대여성 사기극의 소품 하나하나를 그의 무대 위로 끌어올려 집요하게 망신을 준다. 나는 웃었다. 그 연극의 터무니없는 조악함도 우스웠지만, 나를 진심으로 웃게 만든 것은 -글머리에 인용한- 여성 정신건강과 결혼의 상관관계를 논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행동이 정신적으로 다소 건강하지 않게 보일 수 있다. 내가 바로 그 기혼여성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일지라도 어쨌든 나는 기쁨에 사로잡혔다. 결혼이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구성한 나의 오랜 가설을 뒷받침할 근거...

영화 [어제가 오면](see you yesterday, 2019)

지난 달엔가, 트위터에서 우연히 본 영상을 지금도 종종 떠올린다. 미국 쇼핑몰 주차장에서 행인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장면이었다. 경찰은 든 것을 모두 내려놓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리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총성이 터질 것 같은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상대편에서는 한 흑인 여성의 절규가 들려왔다. 아이를 안고 있다고 말이다. 경찰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같은 명령을 반복했다. 영상을 게시한 목격자의 트윗에 따르면 이 일촉즉발의 상황은 그 흑인 여성의 딸과 관계되어 있었다. 엄마와 쇼핑몰에 나왔던 어린 아이가, 몇 달러짜리 인형을 계산하지 않고 들고 나왔단 거였다. 그것이 경찰이 여성과 아이에게 총을 겨눈 이유였다. 가족은 아마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 상황이 유혈사태로 이어졌다면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 영상이 충분히 괴로웠다. 그 가족이,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보호자로서, 양육자로서 느꼈을 모멸감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존엄은 훼손되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들은 무슨 대화를 했을까? 저녁 식사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그 집 아이들이 감각하는 내일은 어제와 같을 수 있었을까? 아이들에게 돈, 지불, 거래 같은 추상적 개념을 가르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이 규칙의 의미를 아직 완전히 습득하지 못한 아이들은 때때로 양육자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그들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마침내 배우게 되어 있다. 나를 정말 슬프게 하는 건, 어떤 아이들에게는 이 ‘사회화 교육비’가 목숨값에 준하며, 그 가격이 피부색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에는 「어제가 오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 어제가 오면 (See You Yesterday) 」(2019)의 주인공 CJ는 흑인이고, 여성이고, 청소년이다. 그리고 미래가 창창한 과학고 천재다. 영화는 타임머신 구동 테스트가 실패하면서 시작된다. 거북이 등딱지 같은 백팩 하나에 엄청난 이론을 우겨 넣...

여성의 아동화, 아동의 여성화, 여성-아동이라는 새로운 신체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 키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내가 키워진 방식을 떠올리면서, 날로 실감하는 것이 있다. 여성혐오와 아동혐오는 닮았다. 그러니까,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성인이 아동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흡사하다. 남자들이 종종 여성의 부정을 긍정의 회피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어떤 어른들은 아동의 거부 의사를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는다. 아이가 씩씩대고 울 때까지 약을 올리는 어른들의 즐거운 얼굴은 나를 소름끼치게 한다. 남성과 성인은 여성과 아동이 표현하는 내용보다 태도에 관심이 더 많다. 여성이 할 말을 참지 않을 때, 남성은 아이가 독립적 인격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부모처럼 화들짝 놀라며 괘씸죄로 긴급 체포를 시도한다. 여성과 아동은 그들에게 엄살 떨기 좋은 소재다. 아이가 갑질하는 상전이라는 양육자의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듯이, 포악한 독재자-여성에게 ‘잡혀’ 사는 남자들은 서로의 신세에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끝없이 잔을 부딪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성혐오와 아동혐오의 교집합을 이루는 요체는 역시 몸일 것이다. 나는 종종 이 ‘다른 몸’을 향한 시선이 모든 혐오의 출발점이 아닐까 의심한다. 남성과 성인에게 여성과 아동의 신체는 자신의 몸으로 재현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대상이다. 검붉고 쪼글쪼글한 상태를 막 탈피한 신생아처럼 부드럽고, 가녀리고, 곡선적이며, 행복감을 실어 나르는,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의 몸은 여성에게도 추구해야 할 미덕으로 주어져 있다. 그것은 자주 자연, 젊음, 생명, 노스탤지어와 동일시되며 이 같은 동일시가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찬미받는다. 여성과 아동의 몸에서 잃어버린 이상향을 발견한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얼굴이라도 파묻을 기세로 싱그러운 향기를 만끽하곤 한다.  몸 감시자들은 그 같은 몸을 갖지 않는 대신 그 같은 몸을 점거하려 시도한다. 불쑥 아기의 볼을 꼬집거나 손발을 주물럭대는 행인처럼, 주인의 권한을 노리는 손들은 여성의 몸을 침범할 기회도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아름...